250115 수요강론: 마태복음 5:17-20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

수요강론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18 views
Notes
Transcript
기도하시겠습니다.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5:17-20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17–20 NKRV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수요강론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와 이제 앞으로 2월까지 3주 동안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살펴볼 예정인데요. 제가 이번에 여러분에게 전해드릴 말씀은 작년 2학기에 유해무 교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산 위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 소위 산상수훈 또는 산상설교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난 번에 유해무 교수님께서 오셨을 때에도 산상수훈에 대해서 말씀을 전해주셨었는데요. 오늘은 이 산상수훈의 전체에서 말한다고 볼 수 있는 “의”에 대한 예수님의 서론격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시작으로 예수님께서는 “의를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뒤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요. 오늘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 구체적으로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 살피면 좋겠습니다.
일단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반드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이 설교를 듣고 있던 당시 청중들이 누구인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설교를 전하는 것의 전제되어 있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먼저 청중들이라고 한다면 4장 끝부분에 등장합니다. 4장 23-25절을 보시면 예수님꼐서 갈릴리에 다니시면서 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셔서 수많은 사람들이 각종 병에 걸린 자들을 데려왔고, 예수님께서 이 모든 병들을 고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병에 걸린 자들, 즉 당시 사회의 약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되었습니다. 이 약자들이 바로 산상수훈의 청중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23절에 따르면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 또한 구원자라는 계시로써 행동으로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 청중들은 이미 복음을 예수님으로부터 듣고 믿고 따르고자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이렇게 사는 자들이 구원을 받게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자들이 그 믿음을 어떻게 실현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산상수훈 가장 앞에 나오는 팔복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팔복은 다 따로따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지켜나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은 자들의 특징으로 한 묶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또한 원문을 살려서 번역을 하면 “행복자들은 심령이 가난하다.”입니다.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보다는 복음을 듣고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 이들이 행복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 또한 당시 약자들이 청중이라는 것, 그리고 이들은 이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자들이라는 맥락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산상수훈을 읽는 것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17절부터 보시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언급하십니다. 여기서 율법이나 선지자는 1차적으로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 즉 구약 성경을 의미합니다. 신약을 보면 율법과 선지자라고 말할 때에는 구약 성경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의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뒤에서 나오지만 오늘 말씀의 핵심은 “율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이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율법이나 선지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선지자도 같이 언급하십니다. 왜 굳이 선지자를 언급하신 걸까요? 그 이유는 주어진 그대로의 율법의 본질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에 의해 해석된 율법을 말씀하시고자 함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 성경 전체에서 말하고 이해하는 율법을 가리키고 있는 것, 바로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항상 율법을 신실하게 지킴으로 언약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부름입니다. 여기에 계신 모두가 아시다시피 언약은 맺을 때는 항상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맺으시는 것이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백성들 모두 쌍방적인 것에 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기에 매번 선지자들이 율법을 말했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율법을 반드시 지키게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17절에서 두 가지 단어가 대조적으로 쓰이고 있는데요. “폐하다”와 “완전하게 하다”입니다. 사실 “완전하게 하다”는 “이루다”, “성취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우리가 얼핏 이 구절을 보면 구약의 율법이 불완전하여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만드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는데 그렇지 않고, 구약부터 계속해서 이어져오던 이 율법을 온전히 드러내시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잘 실천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권위, 즉 뒤에서도 말하겠지만 예수님이 유일한 율법의 표본이라는 뜻이며 예수님만이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겁니다.
또한 율법을 폐하지 않는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폐한다는 것은 율법의 본래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무효화시키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폐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르침을 온전히 드러내고 무효화되도록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정리하자면 17절에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하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왜곡하거나 율법을 파괴시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100프로 다 드러내시고 성취하시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18절에 의해서 더욱 강화가 됩니다. 18절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율법이 없어지지 않고 성취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진실로”라는 것으로 번역된 단어는 “아멘”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진리이며 진실이라는 것을 확언하는 말씀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은 무엇이냐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고 다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라는 것은 언젠가 천지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결코 그럴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더 쉽게 표현하자면 “해가 서쪽에서 뜨기 전에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율법은 결코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성취된다는 강조 표현입니다.
율법을 반드시 성취한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더욱 면밀하게 살펴볼 부분이 있는데요. 바로 “일점 일획”입니다. 점과 획은 글자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다시 말해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고 다 성취하시겠다는 것은 기록된 율법의 점과 획, 즉 율법에 있는 가장 작은 세부 내용까지도 모두 성취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불완전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이어져 오던 그 율법을 온전히 드러내고 세세한 내용까지 성취하러 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율법의 유일한 권위자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율법을 온전히 드러내고 성취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조차도 율법을 범한 적이 있으며, 예수님 당시에 율법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율법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어떻게 하면 준수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매번 예시로 드는 것이 안식일에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것이 안식일에 노동하지 않는 것을 준수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안식일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손 마른 자를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고치셨을 때에도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다면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라는 이 말씀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항상 예수님을 범법자, 율법을 폐하는 자로 생각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직 예수님만이 율법을 온전히 드러내신 분이시며 세세한 내용까지 성취하신 분이십니다. 예를 들면 사마리아인의 비유 속에서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한 사마리아인이 결국 예수님 자신임을 말씀하시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율법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시작하십니다. 19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여기에서 예수님의 언어유희가 등장합니다.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바로 아주 세부한 내용 중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여겨진다고 하고, 반대로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크다고 여겨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계명의 지극히 작은 것을 업신 여기는 사람은 천국에서도 지극히 작게 여겨질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염두해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들이 이미 천국에 갈 것이라고 확정적으로 말씀하시고 계시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천국 밖에 있는 자들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다른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천국에서 지극히 작거나 크다라고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은 율법을 잘 지켰으니까 너는 높은 자리에 앉고, 너는 잘 못 지켰으니까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일례로 18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는 큰 자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낮추시고 높이신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떠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다 부모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 끼를 부리고 무언가를 열심히 노력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것을 기대하며 율법을 행하며 가르치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 최고의 평가와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칭찬보다 보상에 더 높은 가치를 매깁니다. 보상이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며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미슐랭 스타 쉐프에게서 요리 정말 맛있다, 정말 최고다라는 그 칭찬을 들은 요리사는 어떠한 보상을 받는 것보다 더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일겁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을 누구보다도 가장 높은 곳에 계시고 이 세상을 만드신 조물주이십니다. 그런 분에게 높여지고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감격스러움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지금 19절에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이유는 “복음을 들은 행복자들이여 율법의 유일한 권위자인 내가 이 율법을 온전히 드러내고 성취하러 온 것처럼 너희도 율법을 지켜라. 그것이 행복이다.”라는 겁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이미 행복한 자들이 율법을 기꺼이 지키는 것이며 율법을 지키는 것도 행복이라는 겁니다.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다면 율법을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명령과 규례들도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욱 강력하고 아주 급진적으로 말씀하십니다. 2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당시 청중들은 어쩌면 두려움에 휩싸였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당시 청중들, 즉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에서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의로운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청중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사는 거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긍정하시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당시 청중들을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들을 인용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어? 그들보다 더 의롭지 못하면 천국에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그럼 누가 들어갈 수 있는거야?”라며 누구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누구는 자신은 그들보다 낫지 못함을 발견하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두려움에 휩싸였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토록 급진적이고도 강력하게 말씀하신 걸까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어떻게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결국 아무도 천국 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지금까지 실컷 율법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셔놓고 소위 왜 분위기 초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걸까요?
예수님의 이 말의 뜻은 앞에서 다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율법의 표본인 자신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지셨다는 겁니다. 율법의 유일한 권위자, 율법을 온전히 드러내시는 유일한 분이 누구라고 가르치셨습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앞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20절의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내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졌으니 나의 말에 순종하고 나를 따라와라”라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율법을 확대하고 계십니다. 무엇입니까? 이전에는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세세하게 보고 지켜야 했지만, 이제 그 율법의 성취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율법이 총체적으로 되었으니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무엇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는 겁니다.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 그리고 신약에서의 확대된 율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을 지킨 의로운 자, 바로 시편에서 말하는 그 의인은 예수님을 가리켰고, 구약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되신 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반드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입니다.
당시 청중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질 수 있는 모습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심지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하셨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안에서 그것을 찾지 말고 내 안에서 찾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실천하여 의를 행하는 것에 있어서도 자신에게서 그 능력을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로 복음을 들려주시고 믿게 해주셨듯이 언제나 그분의 은혜를 갈구하며 그분의 말씀대로 살 것에 최선을 다합니다.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로운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로움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를 행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서 결코 의로움을 찾을 필요도, 찾을 수도, 찾아서도 안됩니다. 우리 안에는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움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칭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율법을 지킴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부와 성령꼐서 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성부께서는 난폭하고 혼내기를 좋아하는 입법자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율법을 제정하시고 우리가 못 지킨 그 율법을 참 인간이신 성자를 보내심으로 지키셨습니다. 또한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지금도 언제나 돕고 계십니다. 예레미야에서 말하는 우리 마음에 율법을 새기는 것, 바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을 지켜 의를 행할 수 있도록 이토록 일하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지 일인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면서 그리스도를 언제나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의를 행할 능력을 우리 안에서 언제나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선을 우리에게서 그리스도께로 돌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움을 지키는 것을 성취하시는 놀라운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이 땅 가운데서 실현하는 이 놀라운 복을 누리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말씀을 두고 잠깐 같이 기도하면 좋겠는데요. 오늘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들었다면 율법을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지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의를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찾지 못합니다. 그 의는 율법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그리스도에게서 의로움을 찾음으로 율법을 성취하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모습,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나타나도록 기도합시다. 복음을 믿고 실천하는 삶은 곧 율법을 실현하는 삶입니다. 이 시간 이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